잡학사전
신부가 자녀에 교회 물려주자 1139년 '결혼 금지' 못 박아
교황이 주관한 천주교 성직자 회의
'1·2차 라테라노 공의회' 거쳐 합의
과거엔 사제도 결혼해 가정 꾸렸지만
교회 권력 커지면서 세속적으로 변질
올해 성직자 회의서 독신제 재논의
천주교 세계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 가 지난 6일부터 오는 27일까지 바티칸에서 열립니다.
이번 시노드에선 남미 9개 나라 주교를 중심으로 천주교 성직자 260여 명이
아마존 지역에서의 신앙 확산, 환경 보호 등의 주제에 대해 논의할 예정입니다.
그중에서 주목받는 논의 사항이 '기혼 남성에게 사제 서품을 주는 문제' 입니다.
아마존 지역에서 성직자 부족으로 고민하던 천주교가 '사제독신제' 를
일부 지역에서 유연하게 적용하는 걸 논의해 보겠다는 겁니다.
결혼한 사람도 '신부(神父)' 가 될 수 있게 한다는 건데요,
사실 천주교도 처음에는 사제가 결혼할 수 있었어요.
그럼 '사제독신제' 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위키피디아
1130년 열린 2차 라테라노 공의회 모습을 그린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입니다.
천주교는 공의회에서 주교와 신부 등 천주교 사제는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교회법으로 강제합니다.
▣천주교 신부도 결혼할 수 있었어요
지금도 개신교, 성공회, 동방 정교회 등 대부분 기독교 종파의 사제는 결혼하고 아이도 낳을 수 있습니다.
예수의 12사도 중 결혼한 사람이 있는 걸 봐도 사제가 되는 것과 결혼 여부는 별개라는 인식이 있었죠.
천주교도 마찬가지였어요.
천주교는 313년 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공인되면서 본격적으로 교세를 확장합니다.
이에 앞서 열린 엘비라(현 스페인 그라나다) 공의회에서 '성직자들은 아내와 금욕생활을 지켜야 하며,
자녀를 출산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만일 이를 어길 경우 성직의 명예에서 제외될 것' 이라는 말이
나오기는 했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한 합의였어요. 교회법으로 정한 내용이 아니라 강제력이 없었고,
이미 결혼을 한 사제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적용하기도 어려웠죠.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천주교는 계속해서 '금욕적 생활' 을 강조합니다.
4세기 말 시리치오 교황은 '미사를 치르기 하루 전에 사제는 아내와 동침하지 말라' 고 합니다.
인노켄티우스 1세 교황은 "결혼한 사제는 아내와 별거하지 않으면 면직시키겠다" 고 했어요.
가정을 꾸리면 아내나 자식에게 집중하거나 욕심을 내면서 '오롯이 하느님에게 집중할 수 없기 때문' 이라고 설명했죠.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어요. 시간이 지나며 천주교 교회가 점차 세속적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교회는 일부 사제가 자녀에게 교회나 교구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현상을 우려했습니다.
당시 교회의 힘은 영주나 국왕보다도 강했거든요.
사제는 그 권려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유혹을 느꼈어요.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이런 유혹이 없어지겠죠.
수많은 교황이 사제들의 결혼을 막기 위한 정책을 내놓습니다.
우르바노 2세는 "여자와 결별하든지 성직자 신분을 포기하든지 하라" 고 말하기도 했죠.
◈1139년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독신제 공인
산발적으로 나왔던 천주교의 '사제가 결혼하면 처벌한다' 는 외침은 1·2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통해 공식화됩니다.
로마 라테라노 성당에서 열려서 '라테라노 공의회' 라고 부르는데요.
1123년 열린 1차 공의회에서 먼저 사제독신제를 도입하기로 합의가 이뤄집니다.
그리고 1139년 열린 2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통해 해당 내용이 교회법에 명시됩니다.
사제는 결혼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그런 결혼은 불법이자 무효가 됐습니다.
지금 같은 사제독신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겁니다.
그렇지만 지켜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31~1503)는 성직에 있으면서 자식 8명을 뒀고,
자기 아들을 교황 다음 가는 높은 직위인 추기경에 앉히기도 했습니다.
그 아들이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 의 모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체사레 보르자' 입니다.
사제독신제를 도입하면서 막으려고 했던 폐단을 후대 교황이 저지른 것이지요.
※ 주교 임명권 두고 교황·왕 대립
라테라노 공의회서 교황에 보장
사제독신제를 공식화한 라테라노 공의회가 열렸던
주요 목적은 성직자 임명권인 '서임권' 논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였어요.
중세시대 천주교 성직자는 교황 아래에 있으면서,
동시에 국왕의 가신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교황과 국왕은 서로 고위 성직자를
임명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죠.
교황권과 황제권이 대립하다 1122년
칼릭스투스2세 교황과 하인리히 5세 신성로마제국황제가
보름스 협약을 맺습니다. 황제는 교황이 주교를
뽑을 수 있도록 보장했어요. 1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천주교는 이 협약 내용을 공식 승인했어요.
=조선일보 신문은 선생님
기획·구성 : 양지호 기자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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